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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러 번’의 힘, 하시모토 다케시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정보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 있는가. 지식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범람하는 정보 속을 헤매다 보면 결국 참된 지식을 잃어버리기 쉽고, 또 수많은 지식을 접하려다가 정작 소중한 지혜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정보가 넘치는 오늘날, 오히려 지혜를 얻는 법을 고(故) 하시모토 다케시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2020년은 COVID-19로 집에서 책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오랜만에 출판사와 서점 매출이 상승했습니다. 오늘날은 미디어가 워낙 많아져 볼거리, 읽을거리가 넘칩니다. 출판업계는 다양해진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다채로운 책들을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양한 정보를 더 많이 습득할수록 좋은 것일까요.

일본의 나다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하시모토 다케시가 답을 줍니다. 중·고 과정 통합 학교인 나다학교는 도쿄대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이곳을 입시 명문으로 만든 그는 책 한 권을 6년 동안 읽고 또 반복하는 희한한 수업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중학생들이 읽기엔 꽤 어려운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라는 소설을 선택해서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6년간 통독하고 완독하게 한 것입니다.

수업은 한 시간에 한 페이지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는데 학생들은 모든 문장을 천천히 읽고 여기 나오는 한자나 단어를 조사해서 익힙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스스로 제목을 달아봅니다.

일정 분량이 지나면 장별로 내용을 정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설명과 함께 암기합니다. 또 책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감동받은 내용이나 책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짧은 글을 써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에도시대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본 전통 풍습이 자주 나오는데 이런 게 나오면 야외에 나가서 직접 그걸 체험합니다. 이런 식으로 6년 동안 오직 책 한 권만 마스터하는 것이죠.

하시모토의 수업은 소설책 한 권을 읽어가면서 수많은 샛길로 빠졌다가 돌아오는 게 핵심입니다. 그의 수업 방식이 각광을 받자 일본에서 ‘슬로 리딩(Slow Reading)’이라는 책 읽기 방법에 관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수업을 진행한 교사는 하시모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하시모토에게 ‘은수저’ 수업을 듣고 도쿄대 입시를 본 아이들은 “도쿄대의 국어 문제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의 수업을 들은 많은 제자들은 일본의 정관계, 학계, 문화예술계의 지도층이 됐습니다.

하시모토의 느리게 읽고 반복해서 읽기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생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줍니다. 이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고 옛 성현들이 배우던 방법입니다. 옛 선비들은 하나의 책을 백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며 이를 실천했습니다. 열 권의 책을 읽기보다는 좋은 책을 열 번 읽는 것입니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내용을 파악하는 데 급급해서 주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므로 우리 뇌가 정보 습득보다는 그 정보를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데 쓰입니다. 느리게 읽고 여러 번 읽는 것이 정보가 넘치지만 창의성이 더 필요한 현대사회에 진정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 소장 capomaru@gmail.com